시평- 현대의학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자
상태바
시평- 현대의학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자
  • 승인 2009.11.19 17:27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왕

김기왕

contributor@http://


현대의학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자

‘한의학 도그마’ 거부해야 경쟁력 생겨
진료 관계 집약한 원리가 한의학 실체
현대의학 대체 불가능한 의학세계 필요

굳이 ‘정체성의 위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의학이 어떤 학문인가 하는 것은, 기초연구로부터 첨예한 업권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한의계의 모든 사람이 답하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이다. 종래에는 천인상응(天人相應)을 중심으로 한의학을 정의하기도 했고 음양과 오행을 중심으로 한의학을 정의하기도 했다. 또한 대다수 대체보완의학이 공유하고 있는 전체론적 관점(整體觀)을 한의학의 특질로 제시하기도 했다. 조금 더 현대적이고 보편적인 접근을 시도한 사람들은 균형과 조화의 관점을 한의학의 핵심 가치라 말하기도 했다. 보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논하여 장상학설, 경락학설, 기미론 등에 기초한 의학으로 정의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의학은 이러이러 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 학문에 일종의 도그마 즉 불문율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다. 불문율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묻지 마’ 규율이다. 나는 현대 한의학의 모든 곤혹스런 문제가 바로 이런 도그마를 거부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많은 도그마를 지닌 지식체계는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체계와 결코 경쟁할 수 없다. 중세의 신학이 근대의 철학과 과학에 대등하게 경쟁할 수 없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한의학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발전해야 하지만 그 방향이 미리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학문의 발전도 ‘눈먼 시계공’에게 맡겨져야 한다. 그것이 진화하는 지식체계가 취할 수 있는 최적의 생존전략이다. 그렇다면 최근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는, 현대과학, 특히 현대의학의 방법론을 통해 단지 한의학적 치료도구의 효과나 작용기전만을 밝힌 연구들도 한의학 연구로 보아야 할까? 여기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를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뭔가 불안하다.

이런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서두에서 말한 한의학 정체성 위기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한의학은 현대의학으로 환원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일찍이 중의학자 장기성(張其成)은 ‘중의현대화패론(中醫現代化悖論, 1999)’이란 글에서 “중의현대화란 서양의 방법을 도입하자는 것인데, 똑같은 대상(인체)을 똑같은 방법으로 연구하면서 현대의학과 차별적인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고 꼬집었다. 요는, 한의학이 사라지면 인류가 인체를 이해하고 질병에 대처할 한 가지 대안을 다시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의학을 무엇이다 라고 규정하지는 못하더라도 무엇이 가치 있는 한의학 연구인지는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대의학이 말하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말하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한의학도 그러한 지식의 집적체다. 나는 한의의 진단-치료 연관관계를 집약한 상위 원리가 학문으로서 한의학의 실체라 생각한다. 그 원리란 것이 <내경>에 적혀 있는 음양이라든가 천인상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 현대의학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또 다른 인과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가치 있는 부분이며, 한의학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다만 시험적으로 그러한 원리를 추출해 보면 아직도 너무나 많은 불문율이 확인된다. 이들을 어떻게 최소화하고 더 매력적인 지식체계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일 것이다. 의학에 동‧서가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대의학으로 대체 불가능한 또 다른 지식의 원천이 우리 옆에 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김기왕/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091119-칼럼-시평-한의학-음양-김기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해적 2011-12-09 13:16:34
한의대 커리큘럼과 고시제도 등에 대한 김교수님의 제언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제 아들이 비록 김교수님의 강의를 듣지는 못하지만 하루빨리 한의대 교육체계가 재정립되길 바랍니다. 한의학을 공부하는 것이 학문의 원리, 도구도 제대로 정의되지 못한 만큼, 학부모로서 불안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각도에서보면 그만큼 도전적이라 생각되어 한의대 입학에 동의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해적 2011-12-09 13:04:45
"현대의학이 말하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한의학의 과제라는 교수님의 지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군요. 한의학이 하루빨리 "또 다른 인과율"로서 "진단-치료 연관관계를 집약한 상위 원리"가 "매력적인 지식체계"로 제대로 정립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