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의 진료의 기술(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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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의 진료의 기술(38)
  • 승인 2009.11.0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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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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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가 필요한가, 격려가 필요한가

의학적 선언 환자인생에 엄청난 파장
임신불능 뜻하는 불임보다 難姙 쓰자
의사의 격려 때로 약 이상의 힘 지녀

의사가 환자에게 의학적인 선언을 내릴 때 환자의 마음상태를 가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선언은 환자의 인생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원장님이 겪었던 일입니다. 한 여고생이 성장 치료를 위해 성장판 사진을 들고 엄마와 함께 내원했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았더니 성장판이 완전히 닫혔더랍니다. 원장님은 여고생과 엄마 앞에서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자세히 하였고, 이어서 사실적이고, 의학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즉, 성장판이 완전히 닫혔으므로 이제 더 이상은 자라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그리고는 치료를 권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 보냈습니다. 원장님은 당시에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직한 판단을 내린 자신에 대해 좋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한의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항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여고생의 엄마가 원장님의 소양 문제까지 거론하면서 원장님에 대한 악평을 써놓았습니다. 진료를 받고 간 날, 그 여고생이 집에 가서 울고불고 하면서 죽어버리겠다고 난리를 피웠답니다. 엄마가 그러한 딸의 모습을 보고는 분통을 터트리면서 항의를 한 것이지요. 만약 아이에게는 희망을 주고, 엄마에게만 사실대로 의학적인 선언을 내렸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성장이 끝났다는 선언, 이것은 어떤 청소년에는 암선고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환자의 문제에 대한 의학적인 정의를 내릴 때는 그 정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환자가 받아들이는 느낌을 중시해야 합니다. 불임을 예로 들어보자면, 의학적으로 불임은 ‘피임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한 지 1년이 지나도 임신이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원장님은 교과서에 나온 정의대로 환자에게 불임을 선언할 수 있지만, 환자의 가슴에는 대못이 박힙니다. 환자는 불임(infertility)이라는 말을 임신불능(sterility)이라는 말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편이나 시어머니라도 함께 있었다면, 원장님의 불임선언은 바로 이혼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불임이라는 단어가 갖는 파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자 앞에서 불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절망감을 심어주는 것보다는, 임신이 어렵다는 뜻의 난임(難姙)이라는 표현을 쓰실 것을 권합니다.

간혹 환자한테, “왜 이제야 왔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하면 어떡하냐”는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사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의사는 연속극을 너무 많이 본 겁니다. 과연 이 말이 환자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물론 의사는 환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그에 대한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검은 마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의 가슴은 깊은 생각 없이 내뱉어지는 의사들의 말에 피멍이 듭니다. 반대 입장에서 당해 보면 다시는 그러지 못할 겁니다. 같은 사실을 말하더라도 표현은 얼마든지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고가 필요한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건강은 전혀 돌보지 않고, 무턱대고 자만하는 사람은 경고해 줘야죠. 그러나 환자에게 지금 과연 경고가 필요한 지, 아니면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의사의 격려와 위로는 때로 약 이상의 파워를 갖습니다. 마음을 치료하지 못하면 결국 몸도 치료하지 못합니다.

이재성/ 한의사. LK연구소 소장(lkmri.org)

091111-경고-격려-의학적선언-이재성.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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