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주객이 전도된 한의 상병명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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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주객이 전도된 한의 상병명 개정
  • 승인 2009.10.2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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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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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은 증상조합이므로 변증시치에 필수항목
체계적 수집관리 한의학현대화 결정할 관건
주상병명 병렬입력 안하려는 의도 무엇일까

내년부터 한의계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의 단일체계에 따라 진단명을 기입하게 된다. 이른바 U코드 영역을 통해 한의 병명과 한의 증명(證名)을 기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는 하였지만 많은 증례가 일반코드 영역의 진단명, 즉 양방 병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개정안의 연구용역을 발주한 통계청의 바람 역시 한의계에 의한 국가 질병통계의 교란이 허용할만한 오차범위 내로 들어와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개정일까? 원칙적으로 한의 진료부에는 한‧양방 병명과 증명의 3가지가 함께 기입되어야 한다. 한방 병명과 양방 병명은 모두 질병 실체, 즉 단일한 병인과 병리기전을 가진 질병 현상의 연쇄를 단위화하고자 한 것이므로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되겠지만 증은 질병 진행과정의 한 시점에 나타난 증상 조합이므로, 앞의 둘과는 전혀 다른 진단명이며 변증시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골라 적으라고 한다. 마치 진료부에 환자의 나이와 성별 중 하나만 골라 적으라는 것 같다.

사실 이번 개정안의 의도는 뻔하다. 한의계도 양방 진단명 체계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시급한가? 물론 시급하긴 하다. 종래의 한의 상병명 체계는 신뢰할 수 없는 질병통계를 만들어 내는 요인이 되기도 했고 의사나 보험사에 관리 불가능한 진단명을 전달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환자들은 호환 가능한 진단명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다른 정보 제공자의 설명과 비교하길 원한다. 의료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다. 또한 현대의학적 병명은 질병의 예후에 관해 더 직접적인 정보를 준다. 이런 점에서 최소한의 병명 진단은 한의사에게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더 시급한 것은 증(證) 정보의 체계적 수집과 관리다. 한의학을 현대적 수준의 실증적 기반에 올려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관건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한의계의 가장 큰 문제는 약재의 오염도, 제형의 후진성도, 근거의 불충분함도, 그리고 적대 세력의 악의적 비방도 아니다. 우리 학문이 과연 지속가능한 발전을 해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의사 각자가 아무리 현대의학에 정통하고,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한의학이 소멸된다면 한의사는 결국 양방 의료인으로 전환되고 말 것이다. 학문으로서 한의학이 확립되기 위해서라도 병명과 함께 증명은 반드시 진료부에 기록되어야 한다.

이번 개정안을 만들면서 통계청은 주 상병명으로 두 가지 진단명이 병렬적으로 입력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다. 과연 불가능할까? 나는 국가통계의 기술적 측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이는 결국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일 뿐이다. 한의계를 위해 필드(항목) 하나 추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가.

지금의 컴퓨터는 한의서에만 등장하는 갖가지 어려운 한자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유니코드’ 덕분이다. 과거 유니코드 위원회는 코드 전체의 60%를 한글과 한자에 내주었다. 200여 국가가 사용해야 할 코드의 절반 이상을 단 두 나라의 문자에 할당한 것이다. 세계인이 모인 자리에서 만든 코드도 이럴진대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통계체계에 증명(證名)을 입력할 자리 하나 만드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이상하리만치 한의계의 여론에서는 이번 개정안에 대해 찬성과 계몽 일색이다. 분명한 반대 의견도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김기왕/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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