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국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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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과 나
  • 승인 2009.05.2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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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과 나
문무겸전했던 소신과 열정의 의인

지난 17일 박찬국 전 교수가 작고한 뒤 본지는 평소 고인과 경희대 한의대 24기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로서 깊은 우정을 나눠온 유기덕 전 대한한의사협회장에게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요청했다.
이에 유 전 회장은 공식활동에서는 접할 수 없는 고인의 삶의 편린과 단상들을 정리해 보내왔다.
이 글이 박 전 교수의 자취를 더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나와 박찬국은 71년도에 경희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찬국은 큰 키의 공부벌레치고는 운동을 참 좋아하여 배구 실력이 선수 못지않게 뛰어났으며 격렬하기 짝이 없는 1 학년 때에 미식추구 선수로 활동하였습니다.
나는 예과 1학년 때부터 모 이념서클에 들어갔고, 찬국은 나의 권유로 2학년 때에 들어 왔지요. 윤 석용은 본과 1학년 때에 들어왔습니다.
공부벌레이면서 운동선수…. 이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상은 좀 맹하고, 순진해 보이는 그림이지요. 게다가 찬국의 눈빛을 보면 지혜로 초롱초롱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왠지 흐릿하고 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소위 ‘창백한 인텔리겐챠’처럼.

그 한 예가 떠오릅니다.
예과 2학년 때 서클에서 밤섬인가로 수련대회를 갔다 오는 시외버스에서 생긴 일이지요.
버스에 승객은 꽉 차고, 짐들은 많아서 맨 뒷좌석에 짐들을 쌓아 놓았는데 마장동에 도착해서 보니 열린 창문으로 찬국의 배낭이 떨어졌는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찬국에게 배낭에 들어 있는 물건들이 모두 얼마치가 되느냐고 물으니 대략 3000원 어치 정도라고 하여 운전기사에게 그 돈을 배상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지만 응하지 않아 파출소에 신고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찬국이 괜히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포기하자고 하였지만 내가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하니 경찰관 한 분이 따라와 이야기를 쭉 들어 보고는 운전기사가 잘못한 것이라며 3000원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찬국은 심각하게 “자세히 생각하니 500원 정도 더 받아야겠다” 하니 그 말엔 경찰관도 그냥 양보하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찬국의 휘문고 후배가 나에게 “어떻게 찬국이 형같이 고지식한 양반이 우리 서클 활동을 잘하느냐”고 신기해하기에 그 이야기를 하며 “많이 발전했다”고 말했더니 다시 픽 웃으며, “그래 봤자 500원 차이지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찬국의 세상살이에 대한 진보는 항상 “500원 차이”로 놀림을 받았으며 본인도 알고는 멋쩍게 웃더군요.
그렇지만 이제 찬국의 그 정다운 흐릿한 눈빛과 멋쩍은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찬국이 학교에 들어가서 조교를 하기 전에 한의원을 개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자격정지 기간이라 찬국의 한의원에서 진료를 몇 달 했는데, 그때 목격한 찬국은 참으로 격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제 분을 못 이겨서 한약 포장하는 책상을 도끼로 찍어 상처를 낼 만큼. 그리하여 면장 아버님, 고위 경찰직 장인의 체면, 스스로 쌓은 유교적 수양을 덮어버릴 만큼.(찬국은 두고두고 아내에 대하여 미안함을 가지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찬국의 이 숨겨진 격정이 나타난 것이 96년 한약분쟁 당시, 명동성당 앞 장기 천막 농성 의지였습니다.
한의학을 훼손시켜선 안 된다는 소신과 정열이 없고서는 교수 신분으로서 유급을 당하게 될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당시 협회 수석부회장으로서 매일매일 농성장을 방문해서 접하는 것은 그의 한의학에 대한 새파란 열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때만큼 한의학의 현실에 관하여 진지하게 오랫동안 토론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때부터 박찬국 교수는 단순한 상아탑 안에서 원전의 글귀를 읊조리는 문약한 문사가 아니라 거친 세파에 부대끼며 생명을 부지해야 할 한의학을 붙잡고 싸워야 한다는 사명까지 갖게 된 투사의 면모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의학과 인문학, 사회제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해의 폭을 넓혔으며, 본인이 설정한 한의학 발전의 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직책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대한한의학회장도 맡고, 경희대의 한의학연구의 탄탄한 자생 구조를 만들기 위해 연구기금을 만드는 일을 실천하다가 교수직에서 물러나는 일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립대학 재단을 일반 비민주 비합리사회를 비판하듯이 -마치 부정거사 식으로-해 온 찬국으로서는 어떤 일이 생길 때 보호받을 수 있는 보호막이란 게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무렵의 스승이신 홍원식 교수님과 제자 박찬국 교수의 그 타는 가슴과 좌절감을 무엇에 비길 수가 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하고 분합니다. 나는 이때에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이 일로도 자퇴를 하여 결국 늦깎이 졸업을 하였습니다.

찬국은 완고한 근본주의적 한의학자는 아닙니다. 실용주의를 겸비한 유연한 문무겸전의 한의사였음을 웅변으로 증명한 것 중의 하나가 나 이상의 강력한 첩약보험확신주의자였습니다. 한의학의 효용성 확대와 한의원 문턱 낮추기가 한의학의 살 길이라는 나의 의견과 완전히 같았으니까요. 치료의학으로서의 한의학상 정립은 우리가 같이 가꿔 온 이상이기에 찬국은 학술적 토대 마련과 임상에서, 나는 제도개선의 길로써….

그의 학문적 소신은 온병에 대한 천착과 아토피에 대한 응용으로 나타났으며, “침을 놓았을 때 정확한 침혈은 아프지 않다” 하는 견해를 설파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보였던 서양의약학에 대한 일부 배타적, 기피적인 태도는 굉장히 모가 나 보였지만 “완벽한 한의학 추구”, “한의학의 독자적 발전론” 의 강한 모습이겠지요.

이제 찬국은 갔습니다.
찬국을 눈으로 보고 들을 수는 없겠지만 마음에는 추억으로 남겠지요.
그러나 언제 또 찬국과 같은 한의학자, 한의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말한 의인 10인이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제 한 명이 갔습니다.
나는 이것을 서러워합니다.

유 기 덕
경희대 한의대 24기 졸업
경희대 한의대 총동문회장
대한한의사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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