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정 칼럼] 상식의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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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정 칼럼] 상식의 학문
  • 승인 2008.12.1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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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락의 출현에 대해 또는 약재의 기미를 파악해 놓은 것에 대해, ‘고대인들은 기가 발달해 있어서 현대인이 알지 못하는 기의 흐름을 느끼고 적어놓았다’라고 하거나 ‘기수련을 열심히 하면 경락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거나 심지어는 ‘라엘리안들처럼 외계인이나 고도의 선진문명이 남긴 것’이라는 설명을 하기도 한다. 더불어 ‘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신과학과 짜깁기를 하고, 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에너지’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이러한 류의 생각들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싶을 경우 취해지는 방식이다. 즉, ‘우리보다 선진문명이 또는 더 발달된 선지자가 존재하고 그러하다라고 말했으므로 그걸 믿고 그 다음 논리를 전개하자’라는 것으로 이러한 상황에서의 학문은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일견 종교가 쓰는 어법이기도 하다.
기와 경락이 기미성상이 뭔지 밝힌다면 우리의 의학체계는 탄탄해질까?
과연 ‘무엇인지 밝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실체를 밝히는 것일까?
‘경락이 무엇인지 밝히겠다’ 라는 말은 있지만 ‘사과가 무엇인지 밝히겠다’ 라는 말은 낯설다. 우리는 사과가 무엇인지 아는가? 땅이 무엇인지 아는가? take가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는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군가는 땅이 뭐냐는 질문에 “발을 딛고 서는 부분”이라고 했다. 발을 딛고 있는 게 땅이라면 자전거 탈 때 패달도 땅인가? 위키피디아에는 ‘땅은 지구에서 강 또는 바다가 아닌 육지 부분을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달나라에 성조기가 꽂힌 그곳은 지구가 아니므로 땅이 아닌가? 바다의 해저는 땅이 아닌가? 땅을 정의내리는 당신의 언어는 매번 예외에 봉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땅을 명확히 ‘정의’내리고 ‘규정’할 수 없다고 해서 ‘땅’이 존재하느냐? 라는 의문을 품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땅’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서로 설명하지 않아도 문맥 속에서 땅의 ‘性’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땅은 ‘바닥’이 될 수도 있고, ‘씨앗을 심는 토양’이 될 수도 있고, 빌딩의 바닥이 땅이 될 수도 있고 빌딩의 옥상에서 줄을 긋고 ‘땅따먹기’ 놀이를 할 수도 있다. 하늘의 반대가 땅이 될 수도 있고 바다의 반대가 땅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땅’이 과학의 언어가 아니어서 발생하는 일이다. 지리학적 의미의 ‘지오이드 평면’이라거나 물리학적 의미의 ‘그라운드’ 라는 것에 대한 정의는 명확하고 예외도 없다. 그러나 땅이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다” 라거나 “무엇인지 기능을 알 수 없다”는 아닌 것이다.
단지 과학에서 ‘정의’와 ‘특징’에 등가 되는 개념으로서의 ‘性’과 ‘氣’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성정 기미를 파악하여 사물의 이치를 보는 것은 대단한 선지자의 감각으로 파악되거나 고도의 과학문명이 언젠가 밝혀줄 신묘한 그 무엇이 아닌 인간의 이성과 감각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고 가장 효율적인 데이터의 저장형식이자 추상화의 형식이다.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들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공통된 속성에 같은 명명을 하는 추상화작업을 익혀나간다. 왜의 대답은 좀 더 보편타당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의문과 논리적 추상화의 작업. 이것은 수학 기호학 그리고 한의학이 취하고 있는 학문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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