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30] 李炳幸(1906~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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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30] 李炳幸(1906~1974)
  • 승인 2008.08.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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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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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鍼法 확립에 헌신한 鍼灸專門家

1973년 9월 25일 10시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행사가 시작된다. 제3회 세계침구학술대회가 그것이다. 이 대회에는 세계 25개국의 학자 700여명이 모여서 학술대회를 열었다. 당시 대회장이었던 朴勝九는 卷頭辭로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鍼灸療法은 東洋醫學으로서 數千年의 悠久한 傳統을 가져왔으며 특히 우리 韓國에서는 民族醫學으로서 긴 歷史를 通해 大衆의 信賴속에서 治療效果를 發揮하였든 것이다. 第一次를 日本國에서 開催發足하여 다시 第二次를 佛蘭西 파리에서 盛大히 開催한 事實을 慶賀하는 바입니다. 이 大會를 繼續하여 第三次 世界鍼灸學術大會를 韓國에서 開催함을 여러 各國代表들과 같이 無限한 同慶의 기쁨을 禁하지 못하는 바이다.”

본 학술대회에는 많은 한국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데, 대체로 鍼灸學에 대한 특정질환에 대한 연구, 舍岩鍼法에 관한 연구, 특정 혈자리의 효과 등에 대한 내용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논문들 가운데 눈에 띠는 논문이 보인다. 李炳幸의 “太極鍼法”이라는 제목의 발표논문이 그것이다. 호가 晩齋인 李炳幸은 당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선화당한의원을 운영하는 재야의 한의학자로서 鍼灸學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 따르면 李炳幸은 漢學을 10여년 수학하고 15년간 한의학을 연구하였고, 당시 입학하기 어려웠던 충남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여 졸업한 후에 敎員으로 2년간 근무하였다. 이후 뜻한 바 있어 한의학 연구에 더욱 매진하여 1954년에 한의사검정고시가 시행되었던 당시에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후 한의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李炳幸의 저술로 『子午流注法註解』, 『鍼道源流重磨』, 『東醫壽世保元 性命論註解』, 『小兒麻痺退治秘訣』, 『高血壓과 中風』, 『奇經八脈의 新硏究』 등이 있다(1969년 1월 31자 한의사협보의 기사에 근거).

『子午流注法註解』는 1967년에 子午流注法을 소개하기 위한 62쪽의 소책자이고, 『鍼道源流重磨』는 鍼道의 源流인 『鍼灸大成』을 註解한 데다가 여러 鍼法들을 取捨選擇하여 첨가하고 자신의 鍼法인 太極鍼法을 덧붙여 놓은 것이다. 그의 대표저술이라고 꼽을 수 있는 본 저술은 지금도 많이 읽히는 명저로서 이름이 높다.
太極鍼法에 대해서는 1973년 제3회 세계침구학술대회의 논문초록집에 실린 “太極鍼法”이라는 논문에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太極鍼法의 이론적 바탕은 四象體質醫學을 꼽고 있다. 본 논문에서 四象體質에 대해 간결한 도식적 설명을 마친 후에 체질감별법 2가지, 보사법, 취혈법, 적응증 등의 순서로 설명하고 있다.

李炳幸은 학술지 『醫林』에 각종 논문들을 발표하여 활발한 학술활동을 하였다. 뇌염에 대한 나의 연구, 동무의 성명론 주석, 자오유주침법에 따라 치료한 예, 구안와사를 치료한 예 등이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이다. 그의 글은 항상 한의학적 원리에 대한 설명이 논리정연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학문적 기초를 이해하기 쉽도록 하고 있다.
1969년 6월 28일에는 대한한의학회와 대한한의사협회 서울지부가 공동주최하여 李炳幸의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였다. 양 단체는 이씨의 본 학술발표회를 전 한의계의 중요학술 행사로 취급하여 거행하였다. 그는 古典醫學硏究會라는 학술단체의 회장을 맡으면서 학술연구에 매진하였다.

그가 국제적으로 각종 활동을 하였다는 증거가 있다. 일본의 ‘醫道의 日本社’에서 간행한 本問祥白이 쓴 『圖解14經發揮』 중 豊隆穴 부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시정할 것을 약속받아낸 것이 그것이다.
이렇듯 활발한 학술활동으로 그는 1974년까지 한의계의 중심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사망한 것은 1974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해에 나온 『醫林』 109호의 宋壽愛의 추모사를 통해 알 수 있다. 宋壽愛는 “人間李炳幸先生을 追慕함”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李炳幸의 서거를 슬퍼하고 있다.

“우리나라 초창기 한의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신 중에도 독특한 太極鍼法을 연구하셨으니 이것은 李炳幸先生하면 太極鍼法을 聯想케 하리만큼 화려한 經歷을 裝飾하셨고 醫友會를 결성하실 때 빈곤한 경제에서 희생을 아끼지 않으시였으며 항상 원고에 매달리어 쓰러지시기까지의 그 모습이 아롱집니다. 이러한 원인이 선생으로 하여금 오늘의 불행을 빨리 가져오게 한 것이라고 사료됩니다.……人生이란 한번은 꼭 가야할 길이오나 先生님께서 그처럼 速히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幽明의 길이 다른 오늘날, 이러한 넋두리가 무엇이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先生님은 아직도 하고자 하시려던 事業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그러한 未練을 어떻게 청산하셨습니까. 더 좀 長壽하시어 斯學界發展을 위하여 혹은 後輩養成을 위하여 그 熱情을 쏟아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永劫한 追憶이 되었습니다. 고히 잠드시옵소서 先生님의 冥福을 빌 뿐입니다.” <월 1회 게재>

金南一
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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