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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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패러다임, 그리고 21세기의 고민(8)
  • 승인 2008.05.0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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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수

박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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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다임의 변환(상) ■

지난 회의 지뢰복(地雷復)괘에서 첫 번째 효(爻)에 이어 두 번째 효도 음효(陰爻)에서 양효(陽爻)로 변하게 되면 곧 뇌(雷)가 택(澤)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름하여 지택림(地澤臨)괘입니다.
대개 연못은 솟은 땅, 즉 언덕 밑에 접하여 생기니 땅과 연못은 서로 ‘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덕배기로부터 쭉 내려오면 평지 부근 어디엔가 물가가 있고 연못이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지구과학적으로 산 위에서부터 빗물 등이 땅속을 통하여 아래로 아래로 낙하하다가 평지가 나타나면 물이 차오르는 이치에 의해서 언덕아래에 물고임이 생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체를 살펴보아도 몸통에서 가장 아래쪽인 하복부에 주로 물(水氣)이 모여들게 되어 탁수(濁水)는 소변으로 모아지고(방광) 진수(眞水)는 신수(腎水)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소변이 많이 차면 밖으로 빠져나와야 하고 신수도 만영(滿盈)되면 삼초(三焦)를 통하여 전신을 자윤(滋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일 것입니다.
마치 연못에 산속의 동물들이 모여들어 마른 목을 축이는 것과 비가 많이 오거나 사방에서 물이 많이 들어와 넘치면 개울이나 큰 물줄기를 이루어 아래로 흘러 강물이 되거나 바다에까지 갈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입니다.

이렇듯 땅과 연못이 가까이 함이 ‘임(臨)’ 이어서 크고, 형통하며 이롭고 바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팔월에 이르러서는 흉함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 다다르면 가슴이 막힘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제시되었다가 갑자기 ‘흉함’을 논하는 것이 너무 급작스러운 느낌도 있습니다.
중천건(重天乾)의 ‘원·형·이·정(元·亨·利·貞)’이나 중지곤(重地坤)의 ‘원·형·이·빈마지정(元·亨·利·牝馬之貞)’ 모두 ‘늘그러함(常)’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즉 낮이 되면 해가 하늘에서 천천히 나타나 서쪽으로 가고 또 밤이 되면 달이 지긋이 나타나 새벽이 되면서 슬며시 사라지는, 그러한 ‘늘그러함’이 이세상의 ‘원·형·이·정 즉 크고, 형통하며 이롭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크고(元), 해와 달은 만물을 두루 비추며(亨), 봄의 따뜻함은 꽃을 피우고 가을의 시원함은 열매를 맺어 이로우며(利), 생명체는 올바른 후대를 위하여 알찬 씨앗으로 영글어지게(貞) 되는 것이 상리(常理)입니다. 이러한 늘그러함 속에서 때론 좋은 것(吉)도 나타나고 때론 흉한 것(凶)도 나타나는 것이 바로 ‘비상(非常)’입니다. 지택림(地澤臨)괘는 이 비상(非常)중에 ‘흉(凶)한 것’을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왜 지택림괘에 와서 흉한 것에 대비하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지택림괘가 양이 뻗어나는, 한창 물이 오르는 듯한, 그래서 보랏빛 미래만이 눈앞에 그려질 수 있는 형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절적으로 보면 6개의 효중에 2개의 효가 양효가 되었으니 약 4월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봄은 익어가고 있고 이제 점점 양기(陽氣)가 세상에 퍼지게 되어 곧 더운 여름이 됩니다. 여름은 만물이 무성해지는, 울창한 수풀에 매미가 욍욍거리는 ‘번성(蕃盛)’의 계절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뜨거운 여름 때문에 사람이 병이 들 수 있으니 곧 ‘서병(暑病 : 더위먹은 병)’입니다. 달로 따지면 8월에 들기 쉬운 병입니다. 동의보감에서는 한사(寒邪)에 상(傷)했다가 하지(夏至) 이후에 전변(傳變)하면 서병(暑病)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라크와 같이 바깥온도가 거의 50℃에 육박하는 곳은 이러한 더위먹은 병이 들리기 쉽습니다. 이라크에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인가 미군 군의관(특이하게도 미국여자내과전문의가 군의관으로 이라크에 파견되어 온 것입니다.)이 미국인환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의식이 명확치 않고 체온이 높지 않았으며 며칠간의 설사를 수반하고 있는 비만형의 50대 백인 남자였습니다.
우리병원의 군의관들이 진찰 후 내린 소견은 ‘열사병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자를 데리고 온 미군 군의관은 쉽사리 ‘열사병(heatstroke)’이라고 진단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고열과 빠른 맥박 등의 전형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필자가 맥을 짚어보니 ‘허세약지(虛細弱遲)’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몸이 전반적으로 냉(冷)한 느낌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그 미국군의관에게 “내 생각에는 인플루엔자바이러스 종류의 질환인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해석해보면 이른바 ‘복사(伏邪)’의 개념으로 잠복기를 거쳐서 나타난 ‘서병(暑病)-특히 복서(伏暑)’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서 의견을 제시했던 것 같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한의학에 생소했을 미국 여자내과의사에게 ‘서병’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번역’으로 ‘인플루엔자 질환’이라고 이야기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찌됐든 필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 군의관이 흥미로운 소견이라는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격주연재>

朴完洙(경원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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