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의료봉사 참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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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의료봉사 참가기
  • 승인 2003.03.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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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에티오피아 의료봉사 참가기·······김길섭 원장(울산 길한의원)


인술은 곧 사랑, 마음으로 치료


지난 6월 24일부터 7월 3일까지 에티오피아에서 제33차 의료봉사를 실시한 KOMSTA는 한의사 12명을 비롯한 총 17명이 참여해 3천500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이에 본지는 이번 의료봉사에 참가했던 김길섭 원장으로부터 에티오피아 봉사 참가기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6월 24일

오전 진료를 마친 나는 두 명의 KOMSTA 울산지부 단원들과 함께 첫 해외한방의료봉사를 위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 후 에티오피아를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고 비행기가 지겹게 날아가서 도착한 곳이 중간 기착지인 ‘두바이’ 공항이었다.


6월 25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 도착하여 환자들을 진료할 병원 내부를 사전답사 했다. 시설과 공간면에서 만족할 만했다. 오후에는 대사관저에 들러 결승 진출을 향한 한국과 독일의 축구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독립투사처럼 열심히 ‘대∼한민국’을 외쳐됐지만 뒷심부족으로 지고 나니 뭔가 허전한 기분이 느껴졌다. 모두들 애써 잊고 다음날의 진료 준비에 임하였다.


6월 26일

“데라노트”

첫 진료날, 병원문을 들어서는데 환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긴 줄을 형성했다. 진료하기에 앞서 환자마다 일일이 고개를 숙여 ‘데라노트’하면서 인사를 하니 대부분이 당황한 표정으로 누웠던 자세에서 고개를 들어 답례를 해주었다. 그 중에서 더러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우시/O.K’라고 응답하였다. ‘데라노트’는 ‘안녕하십니까?’의 최고 존대말이며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그들을 구제해주러 왔다는 생각을 일체 버리고 섬기러 왔다는 봉사의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6. 25참전 용사를 진료하게 되면 잠시 진료를 멈추고 두 손을 잡고 한국을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진지하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한 번의 침 치료로 큰 치료효과를 보기는 힘들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감사하다는 표현은 아직도 한국의 젊은이들이 참전용사의 도움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6월 27일

와!! 어제보다 줄이 더 길게 늘어섰다. 대부분의 환자가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결핍으로 매우 마른 편인데 사춘기 여학생 하나는 자기는 살이 자꾸 쪄서 고민인데 살 빼는 침을 놓아 달라고 하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측 눈꺼풀에 섬유종이 점점 커져 눈알을 짓누르고 이에 한쪽 눈은 앞을 볼 수가 없는 청년이 왔는데 외관상으로 보아 눈꺼풀에 탁구공 하나가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은 조그만 외과적 의학기술만 있어도 쉽게 치료가 되는데도 고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매일 오라고 하며 정성스레 치료를 해주었지만 시간이 모자랐으며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법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메스로 찢어서 섬유종을 제거한 후 실밥으로 꿰매 주고 싶었다. 이 정도는 군대에서도 간단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6월 28일

환자들을 통계해 보니 천식환자와 위염환자, 피부병 환자가 많아 보였다. 천식환자는 주거생활이 깨끗하지 못해, 위염 환자는 제대로 먹지를 못해, 피부병 환자는 씻지를 못하여 생긴 것 같았다.

어찌 이러한 질병이 하루 아침에 치료가 되겠느냐고 반문해 보다가 이사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단원들은 ‘의술’을 펼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인술’을 펼치러 간다고 생각하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며 또한 ‘인술 곧 ‘사랑’ 이라는 말씀까지 되뇌이면서 진료에 임했다.

모든 환자에게 ‘데라노트’라고 반복적으로 외치다 보니 의술자에서 인술자로 내 자신이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화장실 한번 가게 되는 것도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최면을 걸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앞이 잘 안 보인다는 노인들을 진료할 때 마음이 아팠던 것은 의사가 진료할 일이 아니고 노안으로 나타난 증상인 만큼 안경사가 책임을 질 사항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인들의 눈주위로 침스밴드를 예쁘게 돌려 가면서 붙여 주었더니 다들 고마워했다.

6월 29일

진료 마지막 날이었다. 발바닥이 아파 왔지만 오늘로서 진료를 끝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으로는 며칠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육체는 오늘이 딱 한계였다. 한국에서도 환자를 이렇게만 떠받들었다면 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니었겠느냐는 잠시 허튼 생각도 했다.

눈꺼풀의 커다란 섬유종으로 눈안을 눌러 한쪽 눈만 보인다는 청년도 오늘로써 마지막 치료였다. 삼릉침으로 출혈을 시킨 후 침을 섬유종에다 놓아주었는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여태껏 나는 ‘앰매매/아픕니까’라고 묻지를 않았다. 나의 상식으로는 두터운 섬유종에다 침을 놓으면 약간의 통증만 느낄 뿐이지 아프다는 생각을 못했다.

따라서 그 청년의 눈물은 단지 앞을 보게 해준다는 의사의 치료에 고마워서 흘린 것으로 단정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침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한다. 내 자신이 의사로서 가지고 있는 거만한 권위의식의 단면을 보인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 없다.

진료가 끝났는데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저 사람들은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이며 더구나 기다린다고 점심까지 거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기다리고 있는 150명을 더 진료하고 마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정말로 봉사의 목적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사명감마저 느끼게 했다.


에티오피아 잔상


왜 이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걸인 생활을 하는지 대사관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이 나라는 가뭄이 길어서 농사가 안 되며 어찌하여 적절히 비가 와서 농사를 지었다 하더라도 한번에 큰비가 내리면 농사지은 곡물들이 떠내려 가버리니 아예 짓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저수지가 군데군데 있으면 되겠지만 그만한 국력과 재원이 없어서 못한다고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전통 음식을 자주 해먹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 왜냐고 따져 묻다시피 하니 빵 한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어찌 ‘인제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지 도리어 반문했다. 그리고 우리가 먹고 있는 ‘인제라’는 최고급 음식이라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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