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덕 칼럼] 정책과 파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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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덕 칼럼] 정책과 파벌②
  • 승인 2006.11.2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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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에 근시라는 긍정형의 병증은 없으며 원시라는 긍정형의 병증도 없다. 그저 불능근시, 불능원시라는 부정적인 병증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한의학 용어가 얼마나 합리적인가?
사람들이 어떤 정책이나 제도를 수립하거나 평가하면서, 그것의 효용성, 타당성 등을 검토할 때 ‘근시안적’ 이라는 부정적 취지의 어휘를 흔히 쓰기도 하는데 결국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는 요지일 것이다. 즉, 눈앞에 것만 보인다.
반대로 ‘원시안적’ 이라는 말은 흔히 안 쓰지만, ‘불능근시’ 라는 병증으로 대비하면 자연스러운데 이것은 눈앞의 일도 바로 직시하지 못하는 거품투성이의 허위 이데올로기 추구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한방의보는 86년에 청주·청원 의료보험 시범실시 종료를 앞두고 확대하느냐, 폐지하느냐, 유지하느냐를 두고 기로에 서 있었다. 당시 청주·청원 지역의 한의사회는 현재 급여되고 있는 과립제 단가보다도 훨씬 싼 첩약 단가-예를 들면 오적산은 하루 800원 : 1730원-를 감수해 가면서 확고하게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
이때에 의사·약사들은 “미 검증 의료기술에 보험재정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라는 명분으로, 정부 정책담당자는 “규격화가 안 된 한약재로 인한 관리 곤란” 을 이유로, 한의협 집행부와 일부 기성 유력회원들은 “한의사의 진료 재량권 훼손과 소득 감소”라는 명분으로 반대하여 첩약이 제외되었고, 다음 해인 87년에 이르러서야 비싼 과립제가 급여 되었다.

그 과정을 당시의 대한한의사협회 세력구도 측면에서 보겠다. 협회장 선거에서 비롯된 한의협의 파벌은 14대(1976년)부터 본격화 하였으며 그 후 25대(1993) 선거까지 주로 기존 몇 개 세력의 각축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86년 당시의 한의협 집행부는 국회의원을 지낸 A 회장을 중심으로 한 소위 배00회, P 사단의 연합 세력으로서, 바로 86년 3월 회장 선거에서 S, O 사단 연합 세력의 재임을 저지하고 간신히 승리한 집행부였다. 이 양대 세력들 간의 암투와 긴장이 한방의보 확대열기로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85년의 상황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즉, S 회장 집행부가 85년에는 국민과 회원의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라도 수용하던 “의보 확대는 당연히 청주·청주의 예” 가 되는 것으로들 인식하고 있었다가, 86년에 A 회장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한약 제외로 1년 시범”으로 후퇴하고 87년부터 결국 “단미 엑기스 과립제” 로 고착된 것이다.
의료보험제도는 비싼 관행의료수가를 강제로 다운시키는 측면이 있는데, 한방은 비싼 한약치료비를 다운시키지 않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관행 침구 수가를 현실화하고 시범 당시의 저렴한 약값 원가보다 2배 이상이 비싼 약값을 급여화한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파벌의 폐쇄적 속성상, 그 정점인 회장들의 정치적 로비 선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고, 문제 일으키기를 원치 않는 정치권과 특히 의약정책의 주도권을 지닌 의약계 출신 정관계 인사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며 주무부를 상대로 한 설득의 맥도 인수인계 되지 못했다. 한의계 내의 생산적인 토론은 무의미해졌고, 양 세력 간의 눈치 보기와 상호 양해로 불능원시적인 근시 정책을 수립케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인의 전통과 정서에 기반한 치료한의학으로서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나는 이 사건을 한의학 제도 변천사에서 파벌상의 작폐에 의한 가장 큰 피해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결과 국민은 시범실시 보다 비싼 약재비를 감당해야 했으며 한의학은 치료의학으로서의 가치 추락을 맞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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